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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을 이해하는 다섯 가지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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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광사 작성일17-01-02 11:18 조회5,6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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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5일 분당 대광사에서 열린 인문학 특강에서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는 불교와 인문학의 관계를 설명했다. 그는 부처님이 누구인지 알면, 불교를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하며 ‘붓다란 누구인가’라는 의문점에서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을 들으며 인류문명사적 관점에서 본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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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고 있는 조성택 고려대 교수.

어떤 분들은 아마 사찰에서 인문학 강의를 한다고 하니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하실 겁니다. 요즘 인문학이 유행하다보니 절에서도 인문학 강의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불교만큼 인문학적인 종교도 없습니다.

인문학이 무엇이기에 대학에서는 쇠퇴하는 반면, 사회적으로는 관심이 늘고 있을까요? 대학 안에서 인문학의 쇠퇴는 당연한 일입니다. 지난 100년간 대학에서 인문학은 독점적인 지위를 누려왔습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설명을 인문학만큼 잘하는 학문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과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많은 학문들이 인문학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즉, 인문학이 과거에 안주하다가 지금 쇠퇴하는 운명을 맞은 셈이지요.

인문학의 ‘인문(人文)’은 사람이 그리는 무늬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학문입니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의식주가 해결되면, 자기 삶의 의미와 삶의 품격을 찾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시민들의 욕구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문학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불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불교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알려면 먼저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 안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붓다란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해 불교 전통 안에서가 아닌, 인류문명사적 관점에서 부처님이 누구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다섯 개의 키워드를 찾아보았습니다. 부처님을 이해하는 다섯 가지 키워드 H.Y.I.H.T.입니다.

H / Humanist - 부처님은 인문주의자다

부처님은 인문주의자입니다. 불교전통에서 부처님은 사문유관을 통해서 인생의 고(苦)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시고, 인류와 우주의 스승이 되신 분입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부처님은 인류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까 인문은 사람이 그리는 무늬[人文]라고 했습니다. 그 상대적인 말이 하늘이 그리는 무늬 ‘천문(天文)’이며 자연과학, 신학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였던 에라스무스(Erasmus)가 ‘인문주의’를 언급하기 전까지 서양에서는 이 세상의 질서는 신이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인간의 길흉화복은 오직 신에 달려있으며, 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사제 또는 바라문이라는 계급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행위에 길흉화복이 달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엄격한 카스트 제도가 있었고, 우리나라도 100년 전만 해도 혈통과 족보를 따져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신의 뜻이나 혈통이 아닌,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 그 사람이 정해진다고 부처님이 선언하신 것입니다. 제가 해석하기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은 ‘이 세계의 중심은 나, 곧 인간이다.’는 뜻입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자신의 품격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서양보다 2,000년 이상을 앞서 인문주의적 선언을 한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혹자는 불교 내에서도 불보살의 초월적인 힘에 기대거나, 부처님을 신으로 이해하는 전통이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처님과 불보살의 위신력에 기대는 방편을 쓰는 한편 그 힘은 마찬가지로 내 안에 있다는 생각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내 마음이 유심정토(唯心淨土)라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를 결정한다는 것은 불교가 인간을 위한 종교라는 것을 보여주며, 부처님이 인문주의자였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Y / Young - 부처님은 젊다

부처님은 젊습니다. 젊다는 것은 생각이 젊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불교는 오래되고 낡은 전통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부처님은 29세에 출가했고, 35세에 성도했습니다. 부처님 제자들도 대부분 20-30대에 출가해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부처님 당시 철기가 보급되어 농업생산량이 급증하고, 잉여 생산물을 교환하는 시장이 생겼습니다. 인도가 역사상 가장 잘 살았던 때일지도 모릅니다. 경제가 윤택할 때에 젊은 세대들이 사회가 강요했던 것을 거부하고 집을 뛰쳐나와 사문이 되었습니다. 부처님도 그러한 사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경전에는 부처님이 젊은 시절부터 열반에 드실 때까지 모든 설법이 하루에 설법하신 것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45년 동안 설법하신 내용을 부처님 나이와 연결시켜 그 흐름을 알 수 있으면 참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같은 부처님이라도 35세와 80세의 설법 방식은 분명 다르지 않았을까요?

우리나라 불상을 보면 중후한 멋이 있습니다. 현자는 삶의 전체를 바라볼 수 있어야하는 연배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에서는 지혜의 상징으로 나이가 어느 정도 든 모습을 불상에 새겼습니다. 반면 동남아시아의 불상은 비교적 젊습니다. 꼭 불상 때문이 아니라도 불교는 나이든 종교로 생각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20-30대에게 불교가 더 젊고 생동적인 모습을 드러냈으면 좋겠습니다. 불교는 세상을 개혁하기 위한 정신으로 시작된 젊은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I / Innovator - 부처님은 개혁주의자다

부처님은 개혁주의자입니다. 부처님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실천하는 분입니다. 특히 여성 출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지금도 여성차별이 존재하는데 2500여 년 전 인도에서 여성의 지위는 어땠을까요? 대단히 낮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출가를 허용했을 뿐 아니라, 깨달음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동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히 혁명적인 생각입니다. 또한 신분 차별 없이 ‘승가’를 공화주의적으로 평등하게 이끌어 가셨습니다. 이 두 가지 예시만 보더라도 불교는 혁신적인 종교입니다.

최근 전통적인 기독교국가인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한 호기심이나 누가 포교를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삶에 대한 반성,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절박한 위기감을 의식하고 새로운 대안문명으로써 불교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들은 젊고, 대부분 고학력자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는 전 세계적으로 지금이 불교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첨단 인류문명을 끌고 왔던 것은 기독교 문명이었습니다. 한국도 산업화 단계에서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이고 배웠습니다. 이제 다음 시대에서는 불교가 지닌 혁신적인 사유를 사회에 전파하고, 불교적 방식으로 사회적 갈등과 분쟁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화쟁문화 아카데미를 세워 다른 사람 얘기를 경청하고, 함께 대화를 통해 문제 해결을 하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H / Homeless - 부처님은 출가자다

부처님은 집 없는 사람, 거지, 출가자입니다. 왜 부처님은 집을 떠났을까요? 인류문명사적 관점에서 보면, 집으로 들어오는 문화와 집에서 나가는 문화가 있어 늘 긴장감이 있습니다. 고전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집을 떠나 전쟁을 겪고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불사신이 되게 해주겠다는 등 다양한 유혹이 있지만 그는 자아를 찾기 위해 결국 돌아옵니다. 즉, 인생은 모험이고 여행이지만, 그 여행은 언제나 돌아오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삶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일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유목민의 삶입니다.

지난 문명의 방식이었던,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장애일 수 있습니다. 집이란 우리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주지만 한편으로는 걸림돌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나보다 자기 자식, 자기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보편적 사랑의 실천에 가족이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은 힘과 위안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혈연, 지연, 학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공공성을 실천하는 데 늘 장애요소가 됩니다.

출가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살 수 없는 이유는 결국 내 자식, 내 부모, 내 가족 때문입니다. 출가를 하고 남을 위해서 살겠다고 발원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고민은 해결됩니다.

저는 한국불교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깨달음 지상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고시 공부하듯 한번 깨달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출가의 목적일까요? 출가를 해서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남을 위해 서원하는 것이고, 그때는 내가 지닌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즉,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남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T / Teacher - 부처님은 교사다

부처님은 교사(敎師)입니다. 교사는 도인(道人)과는 구별됩니다. 도인이란 산사에서 관조하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사람입니다. 세속과는 거리를 두고 그곳의 일들을 쓸데없는 일로 치부합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종교적인 깨달음을 대중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최초의 사람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최초로 한 일은 바로 제자를 찾으러 간 것입니다.

제자를 찾으러 간다는 것은 현장에 간다는 것이고, 그 제자에게 일러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깨달은 것처럼 당신들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교사는 모범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스님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그분들의 삶이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삶의 모범을 보여줄 큰 스승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저는 자문합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을 후대에서는 어떻게 평가할까’하고 말입니다. 최근에 많은 정치적 사안들로 옳다, 그르다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지만,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과 악을 불교는 구분하되 분리하지는 않습니다. 2년 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우리는 선장이었던 이준석 씨를 질타하고 악마화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인이라면 내 안의 이준석은 없는지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를 비판하기 이전에, 혹은 그 이후에라도 ‘저런 무책임함이 나에게는 없었을까?’ 질문하는 것 말입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비판하고 없애기 이전에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간디가 ‘나의 목표는 영국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을 변화시키는데 있다’고 했던 것처럼, 저는 이제는 불교가 사회적 발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의와 불의, 이분법적 사고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양 날개가 모두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날개만 있지 몸통이 없습니다. 몸통 없는 새. 몸통의 역할은 우리 시민이 해야 합니다. 시비를 가리는 일은 양 날개에 두고, 두 날개 사이에 대다수를 차지하는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세상, 새롭고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데 불교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성택

고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동국대학교에서 인도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버클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95년부터 2002년까지 뉴욕주립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대통령직속 문화융성위 인문정신 특별위원회 위원,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 인문학단장, 미국종교학회(AAR) 한국종교분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까지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화쟁문화아카데미·시민행성 대표 및 Korea Foundation 해외한국학사업 성과관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인생교과서 부처: 마음을 깨닫는 자가 부처다>(공저) 외 다수가 있다.

정리ㆍ사진:송욱희 기자  bforweg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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